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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 시207

흔들리는 계절/고은영 흔들리는 계절 / (宵火)고은영 한때 견딜 수 없이 범람하던 욕망이 찌끼도 한풀 꺾인 풍경은 어젯밤 사무치게 울었던 빗소리에 흔들려 그 메시지가 한층 검푸르게 깊어만 간다 별 이유도 없이 깊은 물길로 순장돼 가는 연정이여 이제야말로 너는 서글픈 영혼의 떨림으로 세월의 풍상에 삭.. 2019. 9. 14.
술의 미학 외 1/김밝은 술의 미학 김밝은 가끔 심장이 시큰둥해지는 날 곱게 부순 달빛가루에 달콤한 유혹의 혀를 잘 섞은목신 판의 술잔을 받는다 찰나의 눈빛에 취해 비밀의 말들을 너무 많이 마셨나날을 세운 은빛 시선이 애꿎은 꽃잎만 잘라내고 있다 물구나무서던 시간들이절룩거리는 기억을 붙잡고 일어.. 2017. 8. 1.
참회 / 정호승 참 회 /정호승 나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나무 한 그루 심은 적 없으니 죽어 새가 되어도 나뭇가지에 앉아 쉴 수 없으리 나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나무에 물 한번 준 적 없으니 죽어 흙이 되어도 나무 뿌리에 가닿아 잠들지 못하리 나 어쩌면 나무 한그루 심지 않고 늙은 죄가 너무 커 죽어도 .. 2009. 4. 12.
맞바람 아궁이에 솔가지를 넣으며 / 박철 맞바람 아궁이에 솔가지 넣으며 /박철 청솔가지 긁어 넣으며 서울은 너무 혼잡한 것 같애요라고 써내려간 편지를 읽네 눈물이 나네 맞바람 아궁이에 앉아 갑자기 누구라도 찾아올 것 같은 해거름 솔가지 밀어 넣으며 당신은 얼마나 좋겠읍니까라고 써내려간 편지를 읽네 눈물이 나네 젖은 연기 내게.. 2008. 12. 4.
지삿개에서 / 김수열 지삿개에서 김수열 그립다,는 말도 때로는 사치일 때가 있다 노을구름이 산방산 머리 위에 머물고 가파른 바다 魚花 점점이 피어나고 바람 머금은 소나무 긴 한숨 토해내는 순간 바다끝이 하늘이고 하늘끝이 바다가 되는 지삿개에 서면 그립다,라는 말도 그야말로 사치일 때가 있다 가냘픈 털뿌리로 .. 2008. 10. 18.
몸국 / 손세실리아 몸 국 /손세실리아 몸이라고 혹시 들어보셨는지요 암록색 해조류인 몸말에요 남쪽 어느 섬에서는 그것으로 국을 끓여내는데요 모자반이라는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왜 몸이라 하는지 사람 먹는 음식에 하필이면 몸국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먹어보면 절로 알아진다는데요 단, 뒤엉켜 배지근해진 몸의.. 2008. 10. 10.
아버지의 나이 / 정호승 아버지의 나이 정호승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 2008. 10. 5.
오늘 전화선으로 어떤 여자 몸을 던져오네/박재열 오늘 전화선으로 어떤 여자 몸을 던져오네 /박재열 오늘 전화선으로 어떤 여자 몸을 던져오네 오늘 전화선으로 뜨건 뙤약볕, 몸을 던져오네 그 여자 내 책상 위에 벌렁 드러눕네 그 여자 뜨건 모래밭에 내가 걷지 못하네 꽉 조이는 바다가 넘어오네 그 여자 몸은 깔때기, 깊은 우물 하나 보여주네 막 싹.. 2008. 9. 5.
중년의 간이역에는 그리움도 쉬어갑니다 /김설하 중년의 간이역에는 그리움도 쉬어갑니다 / 김설하 통속적인 사랑도 인생의 기착지寄着地 기차 레일 밟는 소리 멀리서 들려올 때 바람 몰려간 플랫폼 우수수 떨어진 낙엽 천장 만장 흩날리고 부서지는 찰나 선들 들어서는 얼굴 하나 차창에 그립니다 사랑이 별거더냐 읊조린 유행가 가사처럼 허무함이.. 2008. 9. 2.
늙은 매미 / 이나명 늙은 매미 /이나명 양 날개는 양 옆구리에 엉성히 붙이고 앞의 네 발은 허공에 띄운 채 두 뒷발로만 겨우 문턱을 붙잡고 있는 세상에서 떨어져 내리기 직전의 너를 본다 우매한 내가 어찌해 보고자 유리창을 탕탕 두드리며 너를 깨우려 한다 네 앞발들이 조금 움직여 허공을 잠시 바득바득 긁는다 (무.. 2008. 8. 16.
남광주역, 첫사랑의 격전지 / 서덕근 남광주역, 첫사랑의 격전지 /서덕근 새벽은 늘 반짝이는 은비늘 비린내로 환했습니다. 시를 쓰는 일이란 매일 뜯어진 하루를 깁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지요. 열차는 희망보다 연착했지만 기나긴 담배 연기 같은 철길 끝 그곳에서 폐렴을 앓는 바다를 보았습니다. 80년의 파랑주의보를 건너온 갈매기 한 .. 2008. 8. 1.
이 여름 한낮을 선풍기가 돌아간다 / 김선태 이 여름 한낮을 선풍기가 돌아간다 /김선태 이 숨막히는 여름 한낮을 선풍기가 돌아간다 한쪽 날개가 상한 선풍기가 돌아간다 덜덜덜 몸의 균형을 잃고 떨면서 돌아간다 날개는 상했어도 이 여름 돌아가는 선풍기는 선풍기다 밀페된 공기의 흐름을 바꿔놓는 선풍기는 아름답다 여름이니까 매미가 우.. 2008. 7. 22.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박철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박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 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 2008. 7. 17.
좋겠다, 마량에 가면 / 이재무 좋겠다, 마량에 가면 /이재무 몰래 숨겨놓은 여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먼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 .. 2008. 7. 13.
당신을 위한 변명 / 서주홍 당신을 위한 변명 /서주홍 아주 잃어버린 사랑의 기억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쉬운 사랑의 미련도 아닌 가슴 저 한편에 네가 남아 있음은 지난 여름날 무심히 핀 들꽃 무리를 환한 얼굴로 달려가 품에 안고는 끝내 고개를 떨구며 흘리던 너의 그 눈물을 내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였음이야 우리들의 여름.. 2008. 7.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