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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 시207

김수영의 시 하나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이 죽기 20일 전에 쓴 마지막 작품 ㅡㅡㅡㅡㅡㅡㅡ 풀은 풀이어야 한다. 뿌리까지 누웠다가 다시 일어서서 웃는 항상 바람에 맞서는 풀이 진정 풀답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김수영은 문인들 사이에서 지독한 노랭이라고 했다. 다른 문인들과 달리 원고료를 받으면 관례처럼 술이나 밥을 동료들에 사지 않고.. 2021. 11. 22.
내가 나에게 보내는 안부 내가 나에게 보내는 안부 신새벽 지구의 숨소리마저 빈 접시처럼 고요해지는 오후 알전구 무료하게 흔들리는 나른한 카페 커피 잔을 잡은 손을 물끄러미 헐렁해진 살갗에 내려앉은 검은 점들 이젠 얕은 물웅덩이에 걸려 넘어지는 허술한 몸뚱이가 되었다. 안아 주기도, 매만져 주기도 안쓰러운 검은 봉투에 담겨 있는 붉은 원피스는 누굴 위해 샀는지 슬픔이 함께 구겨져 있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은 흐려지고 내가 모르고 있는 것들이 점점 어두워지는 고양이 눈으로 밝힌 등대 빛처럼 지척에서도 가늠할 수 없다 어디에나 기대고 싶고 아무 곳이나 밀착하고 싶은 오후 왼손을 오른손이 가만히 쓰다듬는 시간 http://blog.yes24.com/document/15419042 2021. 11. 21.
모감주나무/김성희 김시인의 모감주나무 시를 읽는데 모감주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 이것저것 잡다한 일을 하면서 한나절을 보내고서야 겨우 오식도 공단공원을 떠올렸다. 공원을 온통이다시피 전경을 노랗게 물들인 주인공이 무엇일까 궁금해 하는 찰나에 일찍 떨어진 무른 감을 물컥 밟으면서 섞어 심은 감나무의 낙과에 신경이 쓰여 검색하는 것을 잠시 잊었던 몇 년 전이 겨우 떠올랐다. 이어서 입구쪽에 주차해 놓은 트럭 창문에 기대어 잠든 중년의 운전수가 떠올랐고 예초기로 잡초를 제거하던 젊은 인부가 땀을 훔치던 하얀 수건도 연달아 떠올랐다. 바랜 페인트 색깔에 검은 곰팡이가 잔뜩 엉겨붙은 벤치는 오직 공원이라는 명칭을 갖다 붙이기 위한 장식에 불과했던 여름날이었다. 오래된 사람 떠올리는 것도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 2021. 8. 30.
곡성 도림사 곡성 기차마을에 갔다. 이미 장미는 반쯤 진 상태 장미원 구경을 마치고 도림사에 들러 시원한 계곡을 둘러 보다. 2021. 6. 6.
어떤 타투 태평양을 건너와 꿈의 나라에서도 꿈은 꿀 수 없었습니다 신대륙의 판타지도 잠시 벅찼던 희망은 책갈피 갈피에 꽂아 두고 2세들이 딛고 갈 디딤돌이 되기로 했습니다 그 돌이 단단해지는데 한 세대가 다 가고 사랑하는 여자도 갔습니다 머리칼에는 서리가 무성합니다 여자를 보내고 홀로 남겨진 남자는 가슴에다 그녀의 얼굴을 새겼습니다 한 땀 한 땀 뜨는 바늘에는 아메리칸드림이 얼룩진 땀내가 차별의 눈물이 뜨겁게 스며들었습니다 방금 건너온 길모퉁이에 바람 불고 심장이 두근거릴 때마다 여자는 동백꽃처럼 살아나 함께 웃고 울었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녀를 보내고 스무 해가 더 갔지만 일흔의 남자는 형벌처럼 그녀를 보내지 못했습니다 섬처럼 별처럼 오래 묵힌 꿈처럼 그가 지켜낸 슬픈 약속에 가을 한날 잠들지 못하고 울었습니다.. 2021. 6. 6.
코스모스 심던 시절 골목을 수배합니다/ 최정신 처음 걸음마를 떼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를 가르쳐 준 골목이었어요 밥 짓는 냄새가 그윽한 굴뚝이 구름을 복사하고 모퉁이마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내려다보던 전봇대가 온갖 바깥소식을 전하고 찹쌀떡, 메밀묵이 야경을 돌고 채송화, 분꽃, 과꽃, 코스모스가 계절을 데려다주었어요 고무줄놀이로 근육을 키웠고 땅따먹기로 보폭을 키우기도 했어요 담 밑에 기대 서러움도 달랬고 첫사랑을 빙자해 입술도 훔쳐 갔어요 처마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된장찌개 냄새를 날리며 이마를 맞댄 창가에 구절양장 낭만이 깜박이던 백열등 따스한 불빛은 어디쯤 있을까요 주차금지 팻말에 서정을 빼앗긴 골목 어느 날 굴착기란 괴물이 들이닥쳐 골목이란 골목은 죄다 부수고 박살을 냈어요 골목에서 은혜를 입은 아이들이 자본주의 맹신자.. 2020. 10. 8.
머리 위에 모란꽃, 모란꽃 위 붉은 볏의 닭 머리 위에 모란꽃, 모란꽃 위 붉은 볏의 닭/김밝은 사람만 좋지 사업수완이라고는 젬병인 사람의 운수도 집안에 빵빵한 몸을 가진 암탉을 놓아두면 퐁퐁, 金을 잘 낳을 거라 했는데 신성한 의식처럼 바라보던 암탉의 엉덩이가 아무 데도 쓸모없는 장식품으로 전락해가고 칙칙한 이야기만 졸음처럼 몰려드는지 살을 꼬집어도 스르르 내려앉는 오후 두 시의 눈꺼풀 머리 위에 모란꽃을 얹고 있었던 건 상상이었을까 신의 수작에만 뜨거워지는 몸을 두꺼운 깃털 속에 숨기고 있는 건지 닭의 아랫도리를 만지작거리던 손만 붉어지고 싶어 안간힘이다 꼬ㅡ꼿ㅡ해ㅡ, 꼬ㅡ꼭... 우아한 척 토해내는 한숨 소리만 커져간다 * 김경란 화가의 그림을 보고 ⸺시집『자작나무숲에는 우리가 모르는 문이 있다』(2020년 9월) 김밝은 / 전남 해남 출생... 2020. 9. 25.
선운사 꽃무릇 선운사에서/최영미 ​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 ~ ~ ~ 기억의 마차는 구렁이처럼 산을 타고 꾸역구역 오르더니 어느새 내리막을 쏜살처럼 내달리고 있다. 아름다웠던 순간들도 함께 선운사에도 꽃무릇이 피기 시작했다. #선운사 2020. 9. 20.
물속 엘리스/김루 물속 엘리스/김루 태양이 지고 바다가 잠들면 우리는 양초로 밤을 밝힙니다 물의 정령을 위해 기도하는 아이들을 위해 아래로 더 아래로 물길을 열면 순록은 어디로 헤엄쳐 갈까요 바람을 볼 수 없어 양초는 뜨거워져 가는데 기도할수록 맨발입니다 아이는 어느 초원클럽에서 풀을 뜯고 .. 2020. 4. 28.
나는 자주 위험했다/김성희 목련꽃이 피었습니다/김성희 봄빛의 과부하로 목련이 피었습니다 닥종이 같은 흰 꽃잎이 햇살에 도타워지면 가슴 저릿하게 피어나는 얼굴 문득, 어머니는 웃음이 많았던가 그 웃음을 어디에 간직해 두었던가 광목처럼 뻣뻣한 삶을 다듬이질하고 남은 풀죽같이 힘없는 미소가 삶 어디를 .. 2020. 4. 14.
노루/백석 6일에 주문했는데 오늘 13일에 도착했으니 7일만이다. 서점에서는 책이 빨리 구해져 일찍 보낼 수 있었다고 문자를 보내줬다. 주문한 책 중에 구입하기 좀 복잡한 게 섞여 있었나 보다. 백석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1995년 83세를 일기로 양강도 삼수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자.. 2020. 4. 13.
안개 속에서/이향아 안개 속에서/ 이향아 바람이 불자 안개가 실크스카프처럼 밀린다 밀리고 흘러서 걷힐지라도 도시의 뒷골목 넘치는 하수구와 한 길 사람 속과 오래 가지 못할 거짓말과 무던한 안개가 품고 있던 것들 드러나지 않는 것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안개와 친해져서 사거리 터진 마당의 애.. 2020. 3. 14.
매화가 있는 풍경/박숙경 매화가 있는 풍경/박숙경 봄 햇살과 살바람 사이로 밧줄 하나 흔들린다 사내가 좌우로 아래로 발을 옮길 때마다 꼬리조팝 가지도 덩달아 요동친다 밧줄의 매듭법이 그의 목숨줄 비둘기 몇 마리 허공을 가르면 사내의 눈빛마저 흔들린다 가끔은 매듭을 풀어 낮달에 걸어놓고 숨겨둔 날개.. 2020. 3. 12.
신동엽 문학관 문학과 맞은편 문학과 모습. 오른쪽에 그의 생가 생가 정면 생가 측면 깃발 시 한때 같이 근무했던 임의수 화백의 달력이 있기에 반가운 마음에 하나 가져오다. 임화백의 펜화 임화백의 펜화 껍데기는 가라/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 2020. 2. 22.
처자/고형렬 처자/고형렬 주방 옆 화장실에서 아내가 아들을 목욕시킨다 엄마는 젖이 작아 하는 소리가 가만히 들린다 엄마는 젖이 작아 백열등 켜진 욕실에서 아내는 발가벗었을 것이다 물소리가 쏴아 하다 그치고 아내가 이런다 얘 너 엄마 젖 만져 봐 만져도 돼? 그러엄. 그러고 조용하다 아들이 .. 2019.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