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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 시

아버지의 나이 / 정호승

by 여름B 2008. 10. 5.
  

      아버지의 나이 정호승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 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제재공이셨던 아버지는
          거의 모든 평생을 나무를 켜면서 사셨다.
           
          어릴 적 까무룩 잠든 그러나 결코 늦지 않은 밤에
          아버지가 문을 열면 아버지보다 먼저 톱밥 냄새가 들어왔다.
          아버지 몸에서는 항상 이렇게 풋풋한 톱밥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냄새가 좋았다.
           
          겨울이면 묵직한 목재 토막으로
          팽이를 깎아 주셨고
          미술 시간에 쓸 목판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면
          어김없이 퇴근하시는 아버지의 손에
          대패질이 잘 된 질 좋은 오동나무가 들려 있었다. 
           
          아버자는 그렇게 나무를 켜고
          가정을 켜고 세상을 켜셨다.
           
          입관하기 전 아버지 곁에 누워서
          나는 아버지의 톱밥 냄새를 맡고 있었다.
          아직은 싸늘한 오월의 밤이었다.
           
                                       -여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