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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 시207

가을 / 이이화 그대 오시려거든 뜨겁게 구워졌던 태양이 식어가는 가을날 저녁으로 오세요 붉은 단풍보다 깊어진 노을 한 상 차려놓고 커다란 술잔 귀뚜라미 울음소리 가득 채워 버거운 침묵을 지워 보겠소 갈바람에 부풀려진 무수한 이야기가 낙엽처럼 쓰러져 가고 눈물보다 더 쓸쓸한 노래가 흐를 때 그대가 찬 서릿발 같은 발길을 돌려도 나는 실패한 사랑조차 용서할 테요 모든 것을 비워야만 넉넉해지는 가을날에는 《시하늘》 2022 겨울호 감나무에 해를 가하지 말라고 경고문이 붙어 있다. 차에서 지나며 보기에는 좋은데 막상 사진을 찍으려고 내려 보니 길바닥이 온통 터진 감으로 범벅이 돼 있다. 2022. 12. 28.
기형도에 대한 짧은 생각 빈집 / 기형도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는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풀 / 기형도 나는 맹장을 달고도 草食할 줄 모르는 부끄러운 動物이다 긴 설움을 잠으로 흐르는 구름 속을 서성이며 팔뚝 위로 靜脈을 드러내고 흔들리는 靈魂으로 살았다. 빈 몸을 데리고 네 앞에 서면 네가 흔드는 손짓은 서러우리만치 푸른 信號 아아 밤을 지키며 토해낸 사랑이여 그것은 어둠을 떠받치고 날을 세운 네 아름다운 魂인 것이냐 이.. 2022. 12. 7.
젖무덤/이선정 젖무덤 이선정 도살장에서 쇠망치에 맞아 머리가 터지고 눈 한 쪽이 튀어나온 개 한 마리 실종 찾아보니 근처에 있던 갓 태어난 새끼에게 젖 물린 채 숨짐* 뚝 뚝 세상 어미 젖 모두 그럴 것인데 하얗게 흐려진 마지막까지도 우주에 뚝 떨어져 홀로 살아야 할 자식 걱정 하나로 무덤 속에서도 마르지 않았을 새파란 유선 봉긋하게도 아름다운 그 울컥한 젖무덤 * 2018년 개 도살 금지에 관한 국민청원 관련 글 《치킨의 마지막 설법》 2020. 12. 시산맥 서정시선071 이선정 시집 4쇄 ------------------------ 그날 아침 밥상에서는 숟가락이 밥그릇에 부딪치는 소리만 났다. 아버지, 형, 큰누나, 공범자인지 방관자인지 모를 제삼자들이 일어서 나가고 육식을 않는 작은 누나가 훌쩍이며 나가자 주모.. 2022. 11. 12.
낫은 풀을 이기지 못한다/민병도 낫은 풀을 이기지 못한다 민병도 숫돌에 낫날 세워 웃자란 풀을 베면 속수무책으로 싹둑! 잘려서 쓰러지지만 그 낫이 삼천리 강토의 주인인 적 없었다 풀은 목이 잘려도 낫에 지지 않는다 목 타는 삼복 땡볕과 가을밤 풀벌레 소리, 맨살을 파고든 칼바람에 울어본 까닭이다 퍼렇게 벼린 낫이여, 풀을 이기지 못하느니 낫은 매번 이기고, 이겨서 자꾸 지고 언제나 풀은 지면서 이기기 때문이다 《시마을》 2022 가을 ----------------------- 면도를 할 때마다 강철 면도날이 약한 털에 왜 무디어지는지를 분석한 글을 읽은 생각이 난다. 그런데 그 제목만 생각나지 그것을 분석한 내용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면도를 할 때마다 그 기사가 떠오르면 그 내용을 생각해 내려고 아무리 애써 보지만 단 한 줄도 기억해.. 2022. 11. 6.
행복한 채식주의자/김선아 행복한 채식주의자 김선아 으깨진 미꾸라지는 불판 위 삼겹살은 가마솥 영양탕은 먹지 않는다. 분쇄기에 낀 당근을 데쳐진 시금치를 밑동 구멍난 붉은 고로쇠를 먹는다. 모가지 댕강 잘린 장미 한 송이 식탁에 꽂고 먹는다. 「하얗게 말려 쓰는 슬픔」2022.9. 서정시학 시인선 ㅡㅡ 상추에 삼겹살을 싸고 흰 밥에 배추 김치를 먹으면서 보양탕을 먹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나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월명산 군데군데 단풍이 절정이다. 꽃무릇 이파리도 지금이 가장 아름답다. 철 이른 동백 한 송이 홀로 빛나다. 2022. 11. 4.
선운사에서 / 최영미 피어 있을 땐 몰랐었네 시들어 떨어진 뒤에 그 꽃이 아름다웠음을 비로소 알았네 가을이 짙어갑니다. 시간은 흐르고 생은 순간처럼 지나갑니다. 떨어진 꽃은 아무도 줍지 않는다는 것 아쉬운 가을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2022. 10. 29.
나태주의 시 멀리서 빈다 멀리서 빈다/나태주 ​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2022. 10. 26.
한강의 시 하나 강좌를 신청하러 갔다가 들여다 본 1층 열람실에 이끌리다. 대충 둘러보니 거의 손 하나 타지 않은 새책들이다. 시집 한 권 마치도록 방문자 하나가 없어 오롯이 개인 서재가 되었다. 사방천지가 도서관인 세상이 됐으니 마냥 좋다고만 해야할지. 한강의 시집을 고르다. '채식주의자'도 읽지 못했기에 이거라도 손에 닿으니 읽어보자는 심산이었다. 부딪치는 일상들을 큰 수식없이 담담히 써 내려간 글들이 많다. 골치 아프게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하면 작가에 실례가 될까? 열람실을 자주 이용할 듯 싶다. 2022. 10. 23.
신석정이 기다린 '꽃덤불'은 언제 오려나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 다시 우러러 본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풀에 아득히 안겨보리라. ​ _「꽃덤풀」전문 신석정 문학관은 신석정이 서울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들어온 뒤에 지.. 2022. 10. 22.
숨/진란 을 읽다가 낯익은 이름을 만났습니다. 이미 시집에서 눈을 한 번 맞췄지만 다른 곳에서 또 만나 보니 새로운 느낌이 듭니다. 2022. 9. 25.
시하늘 계간지를 신청하다 눈물/이종섶 어린 연어가 먼바다로 떠나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짓는 어미, 그 물이 1급수인 것은 어미가 흘린 눈물 때문이다 새끼들이 동해를 지나 태평양을 건너 알래스카까지 갔다가 목숨을 걸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어미의 눈물이 그리워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마추픽추에서 띄우는 엽서/정선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아픈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이른바 비굴 한 자루 등에 지고 비 오는 새벽 여섯 시 마추픽추 라마가 잉카 이슬을 맨 먼저 밟는 곳 떠도는 그 대신 바람이 읽겠다 흔들리는 바람 대신 콘도르가 울어 주겠다 석벽의 붉은 꽃 한 송이 니 맘 안다 니 맘 안다 편히 쉬어 가라고 고개를 끄덕이겠다 고독은 우루밤바 계곡처럼 골이 깊고 고통의 음조는 다분히 변덕이 심해서 내 불구를 저 와이나픽.. 2022. 9. 23.
못/ 이아영 ​ 못이란 글자는 아무데도 못가요 못은 한 번 박으면 움직이지 못하지요 움직이면 굽어서 못 쓰잖아요 못이란 연못이지요. 흐르지 못 하는 물이잖아요 또 못자 字가 들어갔네요 연못 속엔 연꽃이 탁한 물을 정화시켜주지요 못이란 못 할 일이 없다니까요 못 할 일이 있다는 말도 되지요 못비가 오면 못밥을 먹을 수 있거든요 못이란 다 못하는 게 아니에요 아무데나 못 박으면 안되지요 편자에나 못을 박지 식도에까지 못을 박다니 참치횟집에서 참치눈물 술을 마셔본 사람은 알아요 딱 한 모금이 목에 걸려 못 넘어가거든요 못이란 뭐든지 자유자재하는 힘을 갖고 있다니까요 ―이아영 시집 『돌확속의 지구본』 (고요아침, 2010) '못'이란 말의 쓰임이 그러고 보면 참 많구나. '연못'의 '못'은 '오목하게 패여 물이.. 2022. 8. 4.
군산 문인의 거리 저녁을 먹고 근린공원을 걷는 일이 잦아졌다. 소화기 계통에 문제가 생겨 병원 신세를 지는 것도 내 몸에 미안한 일이다. 군산 수송근린공원에서 영화관 가는 길에 동산 담벼락을 이용하여 '문인의 거리'를 꾸며 놓았다. 이 길을 지나면서 나는 아나로그 감성에 잠시 젖는다. 시인의 이름을 대고 작품을 하나씩 맛보는 여유가 즐겁다. 봄의 서장/채 규 판 먼 능선을 타고 앉아 가지에 피어오르는 생명의 원시를 노래만큼 흥겨울 때까지 투명한 아픔으로 응시할 수 있다 빛은 고와서 눈과 마주 서는 난간에까지 흐르는데 가장 먼저 산실을 나온 두어 가닥 질서의 끝 여린 음성으로 시작하여 노을이 물든 광장에 반신을 버티는 손짓에서부터 천천히 발효하는 신의 섭리 처음은 혼자여서 마른 잎에 구르는 쪽 그 가득한 곳에 고적해 있지만.. 2022. 5. 15.
아버지/장종권 아버지 장종권 어머니가 종종 아버지를 찾아오신다 눈만 감으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신다 시집 올 때 입었던 색동저고리 입고 오신단다 가만히 쳐다보다 돌아서는 어머니 불러 세우며 용돈이 없기라도 한 것이냐, 내가 주마. 황급히 쫒아나가도 영 답이 없으시단다. 눈 뜨면 사라지는 어머니 만나기 위해 아버지 오지 않는 잠 주무시려고 밤새 씨름 하신다. ―《쿨투라》 2021년 6월호 새해 첫날 아버지가 많이 생각난다. 2022. 1. 1.
만경강의 가을 오랜만에 만경강에 가 보았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 고라니가 빤히 쳐다보다 엉금엉금 자리를 옮긴다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여긴 내 영역인데 저 인간 왜 빨리 안 사라지지?' 하는 듯 나를 지켜 보고 있다 자귀나무들이 소금기를 견디며 계절을 보낸다 청기와 빛 하늘에 비행기가 실선 하나를 넣고 가는 가을 외딴집/안도현 그해 겨울 나는 외딴집으로 갔다 발목이 푹푹 빠지도록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나는 어두워지기 전에 외딴집에 가서 눈 오는 밤 혼자 창을 발갛게 밝히고 소주나 마실 생각이었다 신발은 질컥거렸고 저녁이 와서 나는 어느 구멍가게에 들렀다 외딴집까지 얼마나 더 걸리겠느냐고 주인에게 물었다 그는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외딴집이 어디 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2021. 1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