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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 시

기형도에 대한 짧은 생각

by 여름B 2022. 12. 7.

빈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는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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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 기형도

 

 

나는

맹장을 달고도

草食할 줄 모르는

부끄러운 動物이다

 

긴 설움을

잠으로 흐르는 구름 속을 서성이며

팔뚝 위로 靜脈을 드러내고

흔들리는 靈魂으로 살았다.

 

빈 몸을 데리고 네 앞에 서면 

네가 흔드는 손짓은 

서러우리만치 푸른 信號

아아

밤을 지키며 토해낸 사랑이여

그것은 어둠을 떠받치고 날을 세운

네 아름다운 魂인 것이냐

 

이제는 뿌리를 내리리라

차라리 웃음을 울어야 하는 풀이 되어

부대끼며 살아보자

발을 얽고 흐느껴 보자

 

맑은 날 바람이 불어

멍든 배를 쓸고 지나면

가슴을 울쿼 솟구친

네가 된 나의 노래는 

떼지어 서걱이며

이리저리 떠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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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전집을 중고본으로 구입해 읽는다.

 

'빈집'에 갇혀 '사랑을 잃고 나는 쓴'다던 기형도가 '풀'을 쓴 해는 1979년 9월인데 

79년은 그가 대학에 입학하여 연세문학회 서클에 가입해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하던 해이고

교내신문에 시상하는 '박영준 문학상'에 입상한 해이기도 하다.

당연히 문학 청년의 기세가 넘쳤던 시기였고 적절한 동기부여도 그의 정서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빈집'은 1989년 시집 출간을 준비하다 3월 9일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던 해에 나왔으니

거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초기의 '풀'에서 '부대끼며 발을 얽고 살아보자'던 적극적인 자세는 어디에 가고 말기인 '빈집'에서는

소극적 내지 단절의 세상으로 침잠하려 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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