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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의 흔적이 남은 부안 백산성 부안군 백산면에 있는 백산성은 김제와 부안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동진강을 내려다 보는 작은 산에 있는 성이다. 이 작은 산이 백제의 멸망과 근대사의 한 획을 그은 동학혁명의 중요 지역이 되었다는 게 참 신기하다. "앉으니 죽산이요 서니 백산이로세." 이말은 이 좁디 좁은 산에 죽창을 든 농민군들이 앉으면 손에 든 축창만 보여 죽산(竹山)이 되고 일어서면 그들의 흰 옷 때문에 온통 흰빛이 되어 백산(白山)이 되었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백산성은 아주 낮은 산에 있고 성터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는 동진강을 건너 호남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고 뒤로는 부안 들판과 그 너머로 읍내의 모습까지 다 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아마 날씨가 좋은 날이면 서해바다까지 다 내다 보였으리라. 그래서 지리적으로.. 2022. 11. 29.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과 전동성당 지하경 조용미 우레를 먹고 번개가 내려온다 어둠 속을 번쩍이며 내려오는 구근의 흰 뿌리들 저 뿌리 움켜쥐면 이 어둠을 훌쩍 넘어설 수 있을 텐데 뻗어 내리는 흰 빛의 섬광을 가득 받아먹은 자들 모두 뿌리에 매달려 지하경을 튼튼하게 한다 저 뿌리 움켜쥐면 백만 볼트의 어둠을 제압할 수 있다 죽어가는 자에게 마지막으로 쓴다는 용천혈의 대침같은 섬광을 받아 보아라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문학과 지성 시인선 338 조용미 1962년 경북 고령출생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전주 한옥마을은 봄가을과 겨울이 둘러보기에 딱 좋은 듯하다. 봄가을을 선선한 날씨에 둘러보기 좋고 겨울은 따스한 느낌이 있어 또 다른 맛이 있다 2022. 11. 24.
진안 운일암 반일암 계곡과 주천생태공원 예전 운일암 반일암 계곡엔 여름이면 사람들 새우젓 담아놓은 듯이 가득했었는데 이 가을엔 찾는 사람이라곤 등산객들 몇 사람만이 듬성듬성할 뿐이다. 언제 설치됐는지 모르는 구름다리가 계곡 사이에 놓여져 있고 입구로 사람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계곡에 놓인 육중한 바위들을 감상하며 조용한 산보의 시간을 가지다. 주천생태공원은 언제 생겼는지 모르지만 아마 용담댐이 만들어진 뒤에 생기지 않았을까? 온라인상에서 이 공원의 사진을 마주친 적이 있는데 운일암 반일암 계곡을 다녀오다 우연히 마주쳤다. 수몰지와 가을물이 든 메타세콰이어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간을 잘 맞춰오면 아마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다. 2022. 11. 23.
월명산에서 월명산에서 아내를 먼저 보내고 그동안 다니지 않았던 동국사 가는 길로 내려가 보았다. 삼불사 지나 오른쪽 샛길로 접어드니 지난 날의 기억들이 되살아 난다. 20여 년도 더 지난 오래 전에 다니던 곳을 찾은 것이다. 무릎이 다치기 전에는 휴일이면 월명산 능선을 타고 거의 달렸다. 배수지에서 석치산으로 월명산 장계산 점방산 그리고 설림산을 거쳐 되돌아 오는 코스가 내 길이었다. 붉은 낙옆들이 쌓인 곳을 음미하듯 걷는다. 이제는 야자 매트도 깔아놓아 제법 푹신해졌다. 지팡이를 든 백발 어르신 한 분이 천천히 내려온다. 얼마 뒤의 내 모습이다. 참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느낀다. 사진첩에서 오래된 사진 하나 꺼내들고 옛날을 생각하듯 산길을 내달려 오르내렸던 시절을 잠시 생각했다. 다시 못 올 날들에 대해. 2022. 11. 16.
젖무덤/이선정 젖무덤 이선정 도살장에서 쇠망치에 맞아 머리가 터지고 눈 한 쪽이 튀어나온 개 한 마리 실종 찾아보니 근처에 있던 갓 태어난 새끼에게 젖 물린 채 숨짐* 뚝 뚝 세상 어미 젖 모두 그럴 것인데 하얗게 흐려진 마지막까지도 우주에 뚝 떨어져 홀로 살아야 할 자식 걱정 하나로 무덤 속에서도 마르지 않았을 새파란 유선 봉긋하게도 아름다운 그 울컥한 젖무덤 * 2018년 개 도살 금지에 관한 국민청원 관련 글 《치킨의 마지막 설법》 2020. 12. 시산맥 서정시선071 이선정 시집 4쇄 ------------------------ 그날 아침 밥상에서는 숟가락이 밥그릇에 부딪치는 소리만 났다. 아버지, 형, 큰누나, 공범자인지 방관자인지 모를 제삼자들이 일어서 나가고 육식을 않는 작은 누나가 훌쩍이며 나가자 주모.. 2022. 11. 12.
강천산의 가을 찰칵 오세영 긴 것이나 짧은 것이나 한 편의 영화는 필름의 마지막 신*에서 끝나버린다 그러나 사진은 한번 찍어 영원한 것 ​ 영원을 긴 시간에서 찾지 마라 내일 아침에 헤어질 운명의 남녀도 한 몸이 되어 뒹구는 오늘 밤의 그 순간만큼은 내 사랑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더냐 ​ 무시무종(無始無終)이 어디 있으리 반짝 빛나는 풀랫쉬의 섬광 그 한 찰나가 바로 영원인 것을 ​ *Scene ​​​―계간 《다시올문학》 2022년 가을호 무시무종 찰나가 영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하기 위해 오늘도 셔터를 누르나 보다. 2022. 11. 8.
낫은 풀을 이기지 못한다/민병도 낫은 풀을 이기지 못한다 민병도 숫돌에 낫날 세워 웃자란 풀을 베면 속수무책으로 싹둑! 잘려서 쓰러지지만 그 낫이 삼천리 강토의 주인인 적 없었다 풀은 목이 잘려도 낫에 지지 않는다 목 타는 삼복 땡볕과 가을밤 풀벌레 소리, 맨살을 파고든 칼바람에 울어본 까닭이다 퍼렇게 벼린 낫이여, 풀을 이기지 못하느니 낫은 매번 이기고, 이겨서 자꾸 지고 언제나 풀은 지면서 이기기 때문이다 《시마을》 2022 가을 ----------------------- 면도를 할 때마다 강철 면도날이 약한 털에 왜 무디어지는지를 분석한 글을 읽은 생각이 난다. 그런데 그 제목만 생각나지 그것을 분석한 내용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면도를 할 때마다 그 기사가 떠오르면 그 내용을 생각해 내려고 아무리 애써 보지만 단 한 줄도 기억해.. 2022. 11. 6.
행복한 채식주의자/김선아 행복한 채식주의자 김선아 으깨진 미꾸라지는 불판 위 삼겹살은 가마솥 영양탕은 먹지 않는다. 분쇄기에 낀 당근을 데쳐진 시금치를 밑동 구멍난 붉은 고로쇠를 먹는다. 모가지 댕강 잘린 장미 한 송이 식탁에 꽂고 먹는다. 「하얗게 말려 쓰는 슬픔」2022.9. 서정시학 시인선 ㅡㅡ 상추에 삼겹살을 싸고 흰 밥에 배추 김치를 먹으면서 보양탕을 먹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나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월명산 군데군데 단풍이 절정이다. 꽃무릇 이파리도 지금이 가장 아름답다. 철 이른 동백 한 송이 홀로 빛나다. 2022. 11. 4.
내 익산 친구 내 익산 친구 60 중반을 넘기도록 혼자 사는 익산의 내 친구 영규 '청목'에서 점심을 먹는데 소주 한 병에 쌓인 이야기는 서너 병 집에 가려는 나를 붙잡고 집 앞에 잠시 기다리라 하더니 쇼핑백 하나 들고 온다 이놈은 구워 먹고 저놈은 탕해 먹어 따로따로 포장한 조기 몇 마리에, 몇 날이나 말렸을 정갈한 가지말랭이 한 주먹, 전날 고산에 갔었다며 대봉감도 하나 넣었다 집에 와 봉지를 벗기는데 이렇게 싱싱한 조기들을 보았나 동그란 눈들이 보석처럼 반짝거리네 때때로 우리는 힘든 길을 택했지. 하지만 우린 항상 끝까지 지켜봤지. 친구가 한 명만 남았다면 난 너였으면 좋겠어. - 가사 중에서 -1 2022. 10. 30.
선운사에서 / 최영미 피어 있을 땐 몰랐었네 시들어 떨어진 뒤에 그 꽃이 아름다웠음을 비로소 알았네 가을이 짙어갑니다. 시간은 흐르고 생은 순간처럼 지나갑니다. 떨어진 꽃은 아무도 줍지 않는다는 것 아쉬운 가을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2022. 10. 29.
나태주의 시 멀리서 빈다 멀리서 빈다/나태주 ​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2022. 10. 26.
한강의 시 하나 강좌를 신청하러 갔다가 들여다 본 1층 열람실에 이끌리다. 대충 둘러보니 거의 손 하나 타지 않은 새책들이다. 시집 한 권 마치도록 방문자 하나가 없어 오롯이 개인 서재가 되었다. 사방천지가 도서관인 세상이 됐으니 마냥 좋다고만 해야할지. 한강의 시집을 고르다. '채식주의자'도 읽지 못했기에 이거라도 손에 닿으니 읽어보자는 심산이었다. 부딪치는 일상들을 큰 수식없이 담담히 써 내려간 글들이 많다. 골치 아프게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하면 작가에 실례가 될까? 열람실을 자주 이용할 듯 싶다. 2022. 10. 23.
신석정이 기다린 '꽃덤불'은 언제 오려나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 다시 우러러 본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풀에 아득히 안겨보리라. ​ _「꽃덤풀」전문 신석정 문학관은 신석정이 서울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들어온 뒤에 지.. 2022. 10. 22.
이매창과 이중선의 묘를 가 보다 본명은 이향금(李香今), 자는 천향(天香), 매창(梅窓)은 호이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다 하며, 계랑(癸娘 또는 桂娘)이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는 아전 이탕종(李湯從)이다.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부안에 있는 묘에 세운 비석은 1655년(효종 6) 부풍시사(扶風詩社)가 세운 것이다. 여기에는 1513년(중종 8)에 나서 1550년(명종 5)에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그의 문집 『매창집』 발문에 기록된 생몰 연대가 정확하다. 그는 37세에 요절하였다. 유희경의 시에 계랑에게 주는 시가 10여 편 있다. 『가곡원류』.. 2022. 10. 9.
가을날/노천명 가을 날 노천명 겹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드높아진 하늘은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 예저기 흩어져 촉촉이 젖은 낙엽을 소리 없이 밟으며 허리띠 같은 길을 내놓고 풀밭에 들어 거닐어 보다 ​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마디엔 제철의 아픔을 깃들였다 ​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 들고 이슬에 젖은 치맛자락 휩싸 쥐며 돌아서니 머언 데 기차 소리가 맑다 ―노천명 시집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시인생각, 2013) 2022.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