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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에 담기

내 눈

by 여름B 2005. 12. 22.

     

    거실에서

    호랭이가 시장을 가자고

    기사더러 차 시동걸어 놓으라 했다.

    나는 얼른 내려가서

    창에 가득 쌓인 눈을 맨손으로 털어내고 시동을 걸었다.

    호랭이가 내려오기 전에

    얼른 실내가 뎁혀져야 할 텐데 걱정이다.

    아직 전에 손톱 자국도 아물지 않았는데...

     

    주차장에서

    이삔 미시 아줌마가 눈길에 헛바퀴만 돌리다가

    나를 보자 밀어달라고 한다.

    후진했다가 나가보라고 했더니

    내 바지에 눈을 뿌려놓고 핑허니 잘 빠져 나간다.

    웃으면서 바지를 털다가 문득 호랭이 표정을 보고

    웃기를 그만 두었다.

     

    거리에서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하얀 김을 뿜어대는 것 같다.

    안경을 챙겨오지 못했음을 알았다.

     

    시장에서

    멸치 박스를 들고 따라가는데

    생선가게 앞에 놓인 먹음직스런 양식 굴이 눈에 들어왔다.

    굴밥이 먹고 싶다고 그랬더니

    아무 말 없이 한번 째리고 핑하니 그냥 간다.

    시장을 나오는 길에

    못내 아쉬워 다시 생선가게 앞에 놓인 굴에 눈이 간다.

    아니, 이럴 수가

    그것은 굴이 아니었다.

    쭈꾸미였다.

    세상에 굴과 쭈꾸미를 구분 못하다니...

    그래서 호랭이가 말없이 나를 째렸구나!

      

    차안에서

    나는 비애를 느낀다.

    대양을 응시하던

    코르테스의 독수리 눈은 어디로 갔는가!

    달의 분화구까지 볼 수 있었던 젊은 날의 내 천리안은

    이제 영영 자취를 찾을 수 없단 말인가?

     

    호랭이는 옆에서 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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