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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 시

젖무덤/이선정

by 여름B 2022. 11. 12.

젖무덤

 

이선정

 

 

도살장에서 쇠망치에 맞아

머리가 터지고 눈 한 쪽이 튀어나온

개 한 마리 실종

찾아보니 근처에 있던

갓 태어난 새끼에게 젖 물린 채 숨짐*

 

 

세상 어미 젖 모두 그럴 것인데

하얗게 흐려진 마지막까지도

우주에 뚝 떨어져

홀로 살아야 할 자식 걱정 하나로 

무덤 속에서도 마르지 않았을 새파란 유선

 

봉긋하게도 아름다운 그 울컥한 젖무덤 

 

 

* 2018년 개 도살 금지에 관한 국민청원 관련 글

 

치킨의 마지막 설법2020. 12. 시산맥 서정시선071 이선정 시집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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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밥상에서는 숟가락이 밥그릇에 부딪치는 소리만 났다.

아버지, 형, 큰누나, 공범자인지 방관자인지 모를 제삼자들이 일어서 나가고

육식을 않는 작은 누나가 훌쩍이며 나가자 

주모자와 연락책인 나, 그리고 멀뚱거리는 동생들의 눈동자만 남았다.

 

내 부름에 따라온 성춘이삼촌이 헌가마니를 끌고

뒤안으로 가기 전에 절굿대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뒷마당 풍경이 머리 속에서 수없이 흘러갔다.

 

하청업자가 뚝뚝 떨어지는 신문지 뭉치를 가지고 나가고 주모자가 대문에 들어설 때까지

나는 앞마당의 꽃들만 바라보았다. 

 

그 신문지 뭉치 안에는 머리와 네 다리가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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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지워졌을 법한, 기억하지 않아도 좋을, 한없이 바래고 마른 것들까지도 소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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