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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이 가족

호랭이, 막걸리 마신 날

by 여름B 2008. 11. 6.
 
      오후쯤 해서 호랭이가 막걸리가 먹고 싶다고 전화가 왔다. 깜짝 놀라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왔다. 막걸리를 사 주려고 달려온 것이 아니라, 평소 술이라면 입에도 대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막걸리 타령을 하니 이건 치매의 초기 증상임에 틀림이 없는지라 벽에 인분으로 칠을 하기 전에 막아야 되므로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집에 오니 벌써 나들이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빨리 막걸리 먹으러 가자고 하는 것이다. 생글생글 웃는 모습을 보니 이건 분명 치매다.
      아직 벽에 칠은 하지 않았다. 가끔 가는 막걸리집에 가니 사장 아줌니가 내 인사는 듣는둥 마는둥하고 처음 본 호랭이의 위 아래를 쭈욱 한번 훑어 본다. 이렇게 핸썸한 남자에 어울리지 않는 늙수그레한 여자가 따라왔으니 이상한 모양이다. 사장 아줌니에게 주전자에 두 병만 담으라고 했다.
      그것을 호랭이는 한 잔만 마시고 내가 다 마셨다. 그 한 주잔자로 우리 내외는 적당히 기분이 좋아져서 술집을 나왔다. 집으로 해롱해롱하면서 오는 도중에 큰아들놈의 전화를 받았다. "아빠, 이번 15일 쉬세요?" 백수가 맨날 쉬는 날인데, 짜아식 새삼스럽게 물어 보기는. "왜? 15일에 면회갈까? 뭘 가지고 갈까? 먹고 싶은 것 다 말해라." 술김에 나도 기세가 좋아졌다. "필요한 것은 없고요. 단지 엄마 아빠 보고 싶으니까 이번에 한번 다녀 가셨으면 해서요. 이번 훈련 받느라 정말 고생 많았어요." 한다. "야임마, 느가부지의 군시절에 비하면 그런 것 아무 것도 아니다. 요즘 군대 얼마나 시설 좋고 잘 먹고 좋은데. 아뭏든 알았다. 꼭 가마" "아빠, 그럼 그때 뵐게요. 변동있으면 또 전화할게요" 아들과 통화를 하고 있는 동안 호랭이는 팔에 매달려 해롱거린다. 그리고 집에 와서 고스톱으로 돈좀 잃어 주니 호랭이 입이 아예 보름달만해져서 닫혀질 줄 모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호랭이 목욕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두려운 밤이다. 2008. 11. 05. 여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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