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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 시

흐린 날에는 / 나희덕

by 여름B 2007. 8. 12.
         
               흐린 날에는 
                                               /나희덕
        너무 맑은 날 속으로만 걸어왔던가 
        습기를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여 
        썩기도 전에 
        이 악취는 어디서 오는지,
        바람에 나를 널어 말리지 않고는 
        좀더 가벼워지지 않고는
        그 습한 방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바람은 칼날처럼 깊숙이, 
        꽂힐 때보다 빠져나갈 때 고통은 느껴졌다. 
        나뭇잎들은 떨어져나가지 않을 만큼만 바람에 몸을 뒤튼다.
        저렇게 매달려서, 견디어야 하나 
        구름장 터진 사이로 잠시 드는 햇살
        그러나, 아, 나는 눈부셔 바라볼 수 없다. 
        큰 빛을 보아버린 두 눈은
        그 빛에 멀어서 더듬거려야 하고
        너무 맑게만 살아온 삶은 
        흐린 날 속을 오래오래 걸어야 한다.
        그래야 맞다, 나부끼다 못해
        서로 뒤엉켜 찢겨지고 있는 
        저 잎새의 날들을 넘어야 한다. 
        

     

            기나긴 날을 비에 젖고 바람에 흔들리다
            돌고 돌아와 긴 모가지로 가늘게 눈을 떠 보면
            어느새
            자락 하나 보이지 않는 그대.
            상사화.
             
                                                    007. 08. 12. 여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