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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 시

헛것을 기다리며

by 여름B 2006. 2. 10.
 




            헛것을 기다리며 

                                             /안도현
이제는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그 무엇 무엇이 아니라
그 무엇 무엇도 아닌 헛것이라고, 써야겠다
고추잠자리 날아간 바지랑대 끝에 여전히 앉아 있던 고추잠자리와,
툇마루에서 하모니카를 불다가 여치가 된 외삼촌과, 
문득 어둔 밤 저수지에 잉어 뛰던 소리와,
우주의 이마를 가시로 긁으며 떨어지던 별똥별과,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 새털구름처럼 밀려오던 자잘한 슬픔들을
내 문법 공책에 이제는 받아 적어야겠다
그 동안 나는 헛것을 피해 여기까지 왔다
너의 눈을 재 속에 숨은 숯불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너의 말을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의 귀로 듣지 못하고,
너의 허벅지를 억새밭머리 바람의 혀로 핥지 못하였다
그래 여우라면, 사람의 키를 훌쩍 뛰어넘어
혼을 빼고 간을 빼먹는 네가 여우라면 오너라
나는 전등을 들지 않고도 밤길을 걸어 
그 허망하다는 시의 나라를 찾아가겠다
너 때문에 뜨거워져 하나도 두렵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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