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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 시

코스모스 심던 시절

by 여름B 2020. 10. 8.

골목을 수배합니다/ 최정신

 

 

처음 걸음마를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를 가르쳐 준 골목이었어요


밥 짓는 냄새가 그윽한 굴뚝이 구름을 복사하고
모퉁이마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내려다보던

 

전봇대가 온갖 바깥소식을 전하고
찹쌀떡, 메밀묵이 야경을 돌고
채송화, 분꽃, 과꽃, 코스모스계절을 데려다주었어요


고무줄놀이로 근육을 키웠고
땅따먹기로 보폭을 키우기도 했어요

 

담 밑에 기대 서러움도 달랬고
첫사랑을 빙자해 입술도 훔쳐 갔어요


처마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된장찌개 냄새를 날리며
이마를 맞댄 창가에

 

구절양장 낭만이 깜박이던
백열등 따스한 불빛은 어디쯤 있을까요


주차금지 팻말에 서정을 빼앗긴 골목

 

어느 날 굴착기란 괴물이 들이닥쳐
골목이란 골목은 죄다 부수고 박살을 냈어요
골목에서 은혜를 입은 아이들이
자본주의 맹신자가 되어 골목을 배신했어요


시대가 집어삼킨 골목을 수배합니다

 

계간 시선2019년 봄호

 

경기도 파주 출생

2004문학세계로 등단

시집 구상나무에게 듣다

동인시집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느티나무의 엽서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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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모스는 요즘처럼 꽃의 종류가 셀 수 없을 만큼 흔하지 않았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가을날의 왕비였다. 너무 지천으로 널려 피어 흔하디 흔한 꽃이었기에 낮이면 친구들과

함께 고무신을 벗어들고 벌들을 사냥하기에 바빴고 저녁나절이면 누나들과 함께 한 웅큼씩

잘라와 화병에 꽂아두는 일이 특별한 경우에 속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전날 종례 사항에 괭이나 호미를 가져오라는 내용이 포함되면 다음 날 꽤나 먼 곳까지

코스모스를 심는데 동원되곤 하였다. 학교 공터에 뿌려 놓았던 코스모스 모종들을

한 주먹씩 뽑아들고 교문을 나서서 줄을 맞춰 걸었는데 모자도 없이 온몸으로 막아야 했던

그 뙤약볕을 지금도 기억한다. 수업을 하지 않아서 좋기는 했지만 코스모스를 심는다든지

퇴비를 장만하기 위해 풀 베러 나선다든지 하는 일들은 내게 그리 즐거운 추억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공부를 좋아했던 것도 아닌데 결코 그리운 시절의 일부에는 넣고 싶지는 않은

까닭은 게으름에 붙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래도 코스모스는 이쁘다.

서천 화양면 활동리에서 만난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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