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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에 담기

완주 대아저수지의 4월

by 여름B 2020. 4. 18.








사진은 전북 완주 대아저수지



타인의 나날

 

   최형심

 

 

   달팽이는 말한다. 새와 나무 사이에 걸린 문장이 헐거워지면 당신을 잊어도 될까. 달팽이는 말한다. 왜 날짜 지난 신문 가까이 앉으면 배가 고플까. 달팽이는 말한다. 두 개의 모자를 쓰면 꽃이 될 수 있을까. 너는 말한다. 사라진 발과 사라진 손과 사라진 머리카락과 사라진 발가락에 대하여.

 

   껍데기를 제거한 달팽이 48마리.

   파슬리 2묶음, 마늘 3, 아몬드가루 100g, 버터 150g, 펜넬 뿌리 2, 처빌 1다발, 쪽파 1다발, 1다발, 올리브 오일 100ml, 라임 1, 크랜베리 20g, 소금과 후추 약간.

 

   붉은 피로 빚어진 짐승은 왜 지난여름 산란하지 않았을까. 도마에 젖은 손을 대면 입술만 남은 여자를 만질 수 있을까. 페루를 가본 적 없는 사람과 폐를 나누어 줄 수 없는 사람과 눈동자 아래 빗방울의 표정을 그려 넣은 사람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말할 수 없었다.

 

   소금과 후추와 껍데기가 없는 달팽이들……

 

   다시는 태어나지 마라. 달팽이는 말한다. 왜 머리 위에 수평선을 그린 뒤부터 숨을 쉴 수 없을까. 온몸이 입술인 사람이 죽은 나무 위에 엎드려 있다. 가장 낮은 몸이 그늘을 밀어내고 있다.

 

   젖은 등 위에 놓인 공중이 한 뼘이 채 되지 않았다.

 

 

             ⸺계간 시와 사람2019년 겨울호

      최형심 증명사진 2.jpg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박사과정 수료

2008현대시등단

2009아동문예문학상 수상

2012한국소설신인상 수상

2014시인광장시작품상 수상



  소양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왔다. 전라북도 수목원은 아예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위봉산성도 그냥 지나치고 위봉사도 입구쪽에 눈길을 주었을 뿐 아는 체하지 않고  대아저수지 쪽으로 계속 천천히 달렸다. 대아저수지 상류쪽 어떤 움푹한 골짜기 약수가 흐르는 곳에 자리잡아 아내가 가져온 도시락을 열었다.
  간간히 자동차들이 지나친다. 
 차들은 느릿한데 한가롭지 아니하고 꽃은 피어 방창인데 어둡게만 보인다.
 2020년 4월 어느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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