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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에 담기

바람 피는 언덕에서

by 여름B 2008. 7. 27.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 때 읽은 동화 중에,

천리안을 가진 사나이가 있어서 그 좋은 시력으로 큰 공을 세우고 왕의 사위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도 그런 기회가 있었는데 상대가 왕이 아니라서 나는 부마는 되지 못했다.

 

나는 시력이 너무 좋았다.

고등학교 때 체력검사를 하면 항상 시력은 2.0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왜 시력검사표는 2.0까지만 있을까?

3.0이나 4.0은 없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이보다 더 자세히 검사할 수 있는 시력 검사표는 없냐고 체육선생님께 물으면 대답 대신 머리로

주먹만 날라왔다.

 

군대에 갔다.

야간 순찰을 돌다가 문득 하늘을 보면 쟁반만한 보름달 속에 크고 작은 분화구들이 보였다.

그런데 그 분화구들이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다 볼 수 있는 줄 알았다.

어는 날 순찰을 돌다가 고참한테 저 무수한 분화구좀 보라고 했다가 뒈지게 맞았다.

며칠 뒤 고참의 쌍안경과 내 맨눈의 대결에서 내가 승리를 거둔 뒤 우리 부대에 천리안이 들어왔다고

부대 신문에 내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휴가를 나와 비진도 해수욕장으로 피서를 갔다.

갑빠가 튀어나온 근육질의 육체를 자랑하며 해변 그늘에 앉아 있는데 멀리 바다 한가운데서

부표 하나가 심하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 부표에 간신히 매달려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지켜 보니 가끔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살려달라고 손을 올리는 것 같았다.

수상안전요원에게 쫓아가서 말했다.

저기 바다 가운데 사람이 죽어 가고 있다고.

그랬더니 내가 가리키는 바다를 바라보고 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내 위아래를 한번

훑어 보고 별 웃기는 사람을 다 본다는 듯이 쳐다 보다가 내 웅장한 갑빠를 보고 기가 죽어 쌍안경을

가지러 갔다.

그리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쌍안경으로 한참 동안이나 그 먼 바다를 지켜 보더니 배를 출동시켜

시퍼렇게 다 죽은 사나이 하나 실어 왔다.

구급요원들이 손끝을 따고 뱃속의 물을 빼내고 한참 실랑이를 하니까 겨우 살아났다.

이 사람 때문에 당신이 살았다고 수상요원들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해 줬다.

하지만 그 사람은 촛점조차 맞추지 못하고 있었고 그런 그에게 나는 당신이 왕이냐고 물어 보지 않았다.

수행원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나는 그가 왕이 아님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 바다의 모습은 별로 볼 게 못된다.

더위처럼 늘 뿌옇게 보이거나 비바람에 모습을 감추기 일쑤다.

거제 바다는 구름에 가려 해금강의 모습도,

바람의 언덕에서 보이는 가까운 섬의 모습도 부옇게 보였다

 

독수리같은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던 젊은 날,

천리안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그곳 거제도에서, 멍게 비빔밥에 시원한 졸복탕을 먹고

바람피는 언덕에 올라 바람만 맞다가 털래털래 돌아왔다.

 

                                            2008. 07. 26.    여름비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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