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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 시

풍림모텔 / 류외향

by 여름B 2007. 4. 18.

 

 

                       풍림모텔

                                                                     류외향


              사철탕집이 즐비한 그 골목엔 풍림모텔이 있다 들녘을 달려온 바람이 모텔 외벽에 부딪혀 중심을 잃고 골목 어귀를 돌아나가지 못할 때 그땐 이미 사철탕집의 지붕 너머로 붉은 달이 떠오른 뒤였다 마른 어둠이 몸 뒤채는 소리가 깊어질 때 나는 풍림모텔로 들어갔다 한 그루 은행나무의 손을 잡은 채였다 수천 년을 걸어 그에게로 갔다 오체투지로 다가가 그녀의 속살을 더듬어 물기 마른 나이테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내 손이 그의 허리를 스칠 때마다 그녀의 몸에서 일찍 태어난 잎들이 침대 위로 떨어져 내렸고 커튼을 젖히고 들어온 바람이 그 잎들 위를 자분자분 걸어다녔다 그이 입술이 벌어질 때마다 전생과 후생의 언어들이 비밀스럽게 내 귓바퀴를 간지럽혔고 우수수 일어선 잎들이 공중을 떠다녔다 잎들의 소용돌이, 푸른 블랙홀 속에서 우리는 전율했다 사철탕집 지붕 너머에서 미열 같은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풍림모텔을 나왔다 한 그루 은행나무와 손을 꼭 잡은 채였다 우리를 따라나온 바람이 골목 어귀를 휘몰아쳐갔다 내 몸에 잎이 돋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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