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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 시

하얀 난 / 임혜신

by 여름B 2005. 8. 25.

      하얀 난 /임혜신 편애하였다, 나는 들꽃을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에 덤불 덤불 피어있는 패랭이 제비꽃 싸리꽃을 여느 욕망에도 매달리지 않을 듯이 작고 터져버린 번뇌처럼 가벼운 야생의 꽃을 그리하여 그들이 있을 법한 거친 들길을 헤매었다 짐승처럼 바람처럼 그것이 욕망이며 그것이 번뇌임을 알지 못한 채 꿈꾸었다 깊은 강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수십 년 어둡고 좁은 골짜기에서 그 향기를 그 빛깔을 그러나 어느 날 나를 깨운 것은 커피테이블 위의 분 분 속의 하얀 난이었다 한 줌의 먼지와 몇 가지 화학약품으로 입술과 어깨와 턱을 빚어올린 냉혈의 꽃 그가 한 번 첫겨울의 빗발처럼 단 한 번 아주 깊고 차겁게 나를 꿰뚫어보던 이후로 나는 들꽃을 찾지 않는다 아니 꽃을 찾지 않는다 하얀 나의 창에 꽂혀 그렇게 나의 편애는 끝이 났다 남은 것은 이제 세상 온갖 괴로움을 꽃이라 부르는 일이다 생명의 한가운데 피어나는 번뇌의 싸늘한 살과 뼈를 꽃이라 부르는 일 저 외로운 욕망의 삽질들을 다, 꽃이라 부르는 일......
      2005/08/25 내 허망한 삽질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커피에 찌든 하얀 밤도 빨갛게 충혈된 아침까지도 진정 방랑의 고리를 끊고 네 자궁에 머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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