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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이기

미루나무

by 녀름비 2007. 9. 27.
    미루나무 내 어릴 적 고향집엔 마당을 지나 텃밭끝 울타리에 걸쳐서 미루나 무 한 그루 서 있었다. 여름 날이면 모든 빗방울들은 온통 미루나 무에게 쏟아졌고 밝음이 어둠으로 변하는 시간이나 계절이 바뀌는 날에는 아주 작은 바람이라도 미루나무를 스쳐 지나갔다. 우리 집 울타리 안에선 미루 나무를 거치지 않고 비가 내릴 수 없었고 미루 나무를 젖혀 둔 채 바람은 시작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며칠 째 바람도 불지 않고 비도 내리는 것을 잊어버리고 땀내 나는 부채 바람만이 마루에서 안방으로 들락거릴 때 미루나무 잎사귀들 저 혼 자 하나하나 스러져 가고 있을 줄이야. 송충이는 소나무에 있어야 하는데 손가락만큼 두터운 그리고 그보다 더 긴 몸뚱이를 지닌 갈 색 송충이들이 미루나무 몸뚱이에 닥지닥지 아귀처럼 달라 붙어 마 지막 아기 손 같은 녹음 조각을 뜯어 삼키고 있었다. 도막난 미루 나무가 아버지의 구루마에 송장처럼 실려 성냥공장으로 들어간 그 늦여름엔 비 한 조각도 감히 내려 오지 못했고 계절이 끝나 가도록 바람마저도 숨을 죽이고 죄인처럼 살았다. 2007. 09. 27. 여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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