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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 시

저문 산에 꽃등 하나 내걸다 / 손 세실리아

by 여름B 2006. 11. 3.
        저문 산에 꽃燈 하나 내걸다 손세실리아 산을 내려오다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늙은 나무의 흰 뼈와
        바람에 쪼여 깡치만 남은 샛길이
        세상으로 난 출구를 닫아걸고 있습니다
        아직은 사위가 침침하지만
        곧 사방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들겠지요
        그렇다고 산에 갇힐까 염려는 마세요
        설마 그러기야 할라구요
        또 그런들 어쩌겠어요

        혹시 보이시는지
        점자를 더듬는 소경처럼
        빛이 아물어야만 판독 가능한
        저 내밀한 것들의 아우성 말입니다
        밤하늘을 저공 비행하는
        반딧불이의 뜨거운 몸통과
        흐르지 못하고 서성이는 시린 산그늘,
        팥배나무 잎맥에 파인 바람의 지문과
        억겁을 휘돌아 식물의 육신을 빌려
        짓무른 환부를 째고 해산한
        꽃잎 끈 눈물 같은 사리 한알

        내 안의 오래된 상처도
        푸르고 곱게 부식되어
        다음 생엔 부디
        이마 말간 꽃으로 환생하시기를
        삼가 합장 또 합장하며
        저문 산에 꽃燈 하나 내걸고 내려옵니다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사람의문학]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기차를 놓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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