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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을 걷다

by 여름B 2020. 9. 24.

안개 속에서/이향아

 

 

바람이 불자

안개가 실크스카프처럼 밀린다

밀리고 흘러서 걷힐지라도

도시의 뒷골목 넘치는 하수구와

한 길 사람 속과

오래 가지 못할 거짓말과

무던한 안개가 품고 있던 것들

드러나지 않는 것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안개와 친해져서

사거리 터진 마당의 애매한 취기

불확실한 경계

용서할 수 있는 미결의

꿈속 같은 그늘이 불편하지 않다

 

안개 걷혀도 미지수의 괄호들은 남을 것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차라리 자욱할 때 평안들 하신지

어슴푸레 열릴 듯한 은은한 천지.

 

-이향아 시집 안개 속에서(시문학사, 2017)에서

 

 

장마에 대한 기억이 서서히 멀어진 요즘

문득 일어나 밖을 내다 보니 안개가 자욱하다.

이 진한 운무는 여름이 지나고 처음인 듯 싶다.

아침을 마치고도 쉽게 가시지 않는 모습에 들길로 나서 보다.

녹두꽃이며 닭의장풀이며 강아지풀 억새꽃들이 안개에 젖어 있다.

거미들이 아파트을 형성한 마른 풀을 곁에 두고

수로 공사 중인 굴삭기가 낮은 울음으로 들판을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