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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의 전나무 길 주말이 되어 내려온 딸과 호랭이를 데리고 바람을 쐬러 내소사를 다녀오다. 가족으로 연인으로 이루어진 상춘객들이 조용히 전나무 숲길을 걸어서 천년 고목이 마당에 우뚝한 경내를 거닌다. 흑매는 지는 중인데 백목련은 이제 한창이다. 모양을 잘 잡은 산수유 앞에 사진찍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다리가 불편하신 어르신을 손자들이 휠체어에 모시고 깔깔거린다. 나서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 자연이라면 똑같이 누리를 혜택인데 어떤 것은 하루를 살다가고 어떤 것을 천 년을 누리기도 한다. 하루든 천 년이든 후회없는 삶을 누렸으면 만족한 생이리라. 오후 바람이 차가웠다. 2021. 3. 25.
군산 오성산의 봄 아내와 오성산에 오른 날 마침 패러글라이딩 동호팀이 봄손님맞이를 하고 있었다. 손님을 태우는 팀과 현장 보조요원 그리고 다시 팀원을 회수해 오는 픽업팀. 이렇게 분담해서 즐겁게 봄 속을 날고 있었다. 안전요원인 듯 싶다. 출발할 때 안전하게 잡아주는 역할과 날고 있는 팀과 끊임없이 큰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손님이 카메라를 들고 앞에 타고 운전자가 뒤에 자리한다. 패러글라이딩 색깔도 유난히 고운 봄날이다. 2021. 3. 20.
군산 하제 가는 길 으악새/강영은 아아, 으악새 슬피 우는, 종결형의 가을이 매번 찾아왔으므로 나는 으악새가 호사도요,흑꼬리도요,알락 꼬리마도요 같은,울음 끝이 긴 새 이름인 줄만 알았다 한라산의 능선 길, 하얀 뼈마디 숨겨진 길을 걸으며 억새의 울음소리를 잠시 들은 적은 있지만 내몸의 깃털들 빠져나가 바람에 나부끼는 유목의 가을, 능선의 목울대를 조율하는 새를 보았다 生에 더 오를 일이 남아 있지 않다고, 농약 탄 막걸리를 목구멍에 들이 부었다는 작은 외삼촌, 한라산 중턱 에 무덤 한 채 세운 그를 만나러 앞 오름 지나던 그날, 차창 너머 햇빛에 머리 푼 으악새, 출렁이는 몸짓이 뼈 만 남은 삼촌의 손가락 같았다 어깨 들썩이며 우는 삼촌의 아흐, 희고 흰 손가락, 그날 이후 손가락만 남아 손 가락이 입이 된 새를 사랑하게.. 2020. 10. 18.
부여 궁남지에서 궁남지에는 가을 속에 아직 여름이 조금 남아 있다. 한가위 휴가 속에 가족끼리 연인끼리 혹은 유모차를 밀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달랑 혼자서 느긋하게 상념에 젖어 걷기도 한다. 흔들의자에 앉은이는 조금 차가워진 분수에 바짝 팔짱을 끼고 시든 연잎과 마지막 남은 국적 모를 연꽃들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네 타던 소녀의 웃음 소리에 웃옷을 벗는 아빠의 모습을 발견한다. 가을에 와야만 봄여름이 짧았음을 비로소 안다. 가을 징검다리에서 내가 지금 어디 쯤을 건너고 있음도 안다. 이 가을이 조금이나마 길었으면 좋겠다. 2020. 10. 10.
코스모스 심던 시절 골목을 수배합니다/ 최정신 처음 걸음마를 떼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를 가르쳐 준 골목이었어요 밥 짓는 냄새가 그윽한 굴뚝이 구름을 복사하고 모퉁이마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내려다보던 전봇대가 온갖 바깥소식을 전하고 찹쌀떡, 메밀묵이 야경을 돌고 채송화, 분꽃, 과꽃, 코스모스가 계절을 데려다주었어요 고무줄놀이로 근육을 키웠고 땅따먹기로 보폭을 키우기도 했어요 담 밑에 기대 서러움도 달랬고 첫사랑을 빙자해 입술도 훔쳐 갔어요 처마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된장찌개 냄새를 날리며 이마를 맞댄 창가에 구절양장 낭만이 깜박이던 백열등 따스한 불빛은 어디쯤 있을까요 주차금지 팻말에 서정을 빼앗긴 골목 어느 날 굴착기란 괴물이 들이닥쳐 골목이란 골목은 죄다 부수고 박살을 냈어요 골목에서 은혜를 입은 아이들이 자본주의 맹신자.. 2020. 10. 8.
불갑사 꽃무릇 5~6세 쯤해서 우리 읍내에도 전기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물론 하루에 몇 시간씩 시간제로 공급되었기 때문에 늦은 밤에는 석유내 나는 등잔불이나 마지막 빨간 불빛을 보이며 사라지던 촛불에서 상당 기간 벗어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아홉시 쯤이었을까? 그때가 전기 공급이 끊기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시각이 되면 윗방 아랫방에서 생활하던 우리 형제 자매들은 할머니의 지시에 따라 모두 자리에 누워야 했다. 그리고 투명 유리의 백열등이 스르르 꺼지는 그 순간을 누가 정확히 맞히는지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 이윽고 전기가 끊기고 눈 앞이 캄캄해지면 누가 제일 정확했는지를 가지고 한바탕 웃으면서 잠에 수렁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 당시는 전류가 한 순간에 들어오거나 끊기지 않고 약 2~3초 정도의 시간을 두고 서서히 .. 2020. 9. 30.
머리 위에 모란꽃, 모란꽃 위 붉은 볏의 닭 머리 위에 모란꽃, 모란꽃 위 붉은 볏의 닭/김밝은 사람만 좋지 사업수완이라고는 젬병인 사람의 운수도 집안에 빵빵한 몸을 가진 암탉을 놓아두면 퐁퐁, 金을 잘 낳을 거라 했는데 신성한 의식처럼 바라보던 암탉의 엉덩이가 아무 데도 쓸모없는 장식품으로 전락해가고 칙칙한 이야기만 졸음처럼 몰려드는지 살을 꼬집어도 스르르 내려앉는 오후 두 시의 눈꺼풀 머리 위에 모란꽃을 얹고 있었던 건 상상이었을까 신의 수작에만 뜨거워지는 몸을 두꺼운 깃털 속에 숨기고 있는 건지 닭의 아랫도리를 만지작거리던 손만 붉어지고 싶어 안간힘이다 꼬ㅡ꼿ㅡ해ㅡ, 꼬ㅡ꼭... 우아한 척 토해내는 한숨 소리만 커져간다 * 김경란 화가의 그림을 보고 ⸺시집『자작나무숲에는 우리가 모르는 문이 있다』(2020년 9월) 김밝은 / 전남 해남 출생... 2020. 9. 25.
안개 속을 걷다 안개 속에서/이향아 바람이 불자 안개가 실크스카프처럼 밀린다 밀리고 흘러서 걷힐지라도 도시의 뒷골목 넘치는 하수구와 한 길 사람 속과 오래 가지 못할 거짓말과 무던한 안개가 품고 있던 것들 드러나지 않는 것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안개와 친해져서 사거리 터진 마당의 애매한 취기 불확실한 경계 용서할 수 있는 미결의 꿈속 같은 그늘이 불편하지 않다 안개 걷혀도 미지수의 괄호들은 남을 것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차라리 자욱할 때 평안들 하신지 어슴푸레 열릴 듯한 은은한 천지. -이향아 시집 『안개 속에서』(시문학사, 2017)에서 장마에 대한 기억이 서서히 멀어진 요즘 문득 일어나 밖을 내다 보니 안개가 자욱하다. 이 진한 운무는 여름이 지나고 처음인 듯 싶다. 아침을 마치고도 쉽게 가시지 않는 모습에 .. 2020. 9. 24.
선운사 꽃무릇 선운사에서/최영미 ​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 ~ ~ ~ 기억의 마차는 구렁이처럼 산을 타고 꾸역구역 오르더니 어느새 내리막을 쏜살처럼 내달리고 있다. 아름다웠던 순간들도 함께 선운사에도 꽃무릇이 피기 시작했다. #선운사 2020. 9. 20.
참취향에 취하다 비소식이 들려와 농장에 들러 그동안 미처 파종하지 못했던 더덕, 도라지, 고수를 군데군데 뿌렸다. 베란다 박스 안 비닐봉투에서 몇 달을 숨죽이다 봄바람에 일찌감치 기지개를 켜고 박스를 벗어나길 손꼽아 기다렸을 씨앗들에게 늑장만 부리는 내 모습이 무얼로 비춰졌을까. 대나무가 쓰러지면서 엄나무들이 많이 다쳤다. 채취 시기도 늦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순을 뜯다 보니 한 주먹은 된다. 내년엔 채취시기를 놓치지 말아야겠다. 며칠 사이에 참취도 많이 자랐다. 대나무 그늘이 사라진 게 원인일까. 작년보다 개체수가 좀 줄어든 느낌이다. 그래도 무더기진 곳들이 보이고 한 식구가 맛보기 정도는 되는 것으로 만족의 웃음도 지어 본다. 무성한 곳에서는 줄기 채 뜯었다. 손톱 끝에서 번지기 시작한 취향내가 코끝을 .. 2020. 5. 8.
물속 엘리스/김루 물속 엘리스/김루 태양이 지고 바다가 잠들면 우리는 양초로 밤을 밝힙니다 물의 정령을 위해 기도하는 아이들을 위해 아래로 더 아래로 물길을 열면 순록은 어디로 헤엄쳐 갈까요 바람을 볼 수 없어 양초는 뜨거워져 가는데 기도할수록 맨발입니다 아이는 어느 초원클럽에서 풀을 뜯고 .. 2020. 4. 28.
완주 대아저수지의 4월 사진은 전북 완주 대아저수지 타인의 나날 최형심 달팽이는 말한다. 새와 나무 사이에 걸린 문장이 헐거워지면 당신을 잊어도 될까. 달팽이는 말한다. 왜 날짜 지난 신문 가까이 앉으면 배가 고플까. 달팽이는 말한다. 두 개의 모자를 쓰면 꽃이 될 수 있을까. 너는 말한다. 사라진 발과 사.. 2020. 4. 18.
나는 자주 위험했다/김성희 목련꽃이 피었습니다/김성희 봄빛의 과부하로 목련이 피었습니다 닥종이 같은 흰 꽃잎이 햇살에 도타워지면 가슴 저릿하게 피어나는 얼굴 문득, 어머니는 웃음이 많았던가 그 웃음을 어디에 간직해 두었던가 광목처럼 뻣뻣한 삶을 다듬이질하고 남은 풀죽같이 힘없는 미소가 삶 어디를 .. 2020. 4. 14.
노루/백석 6일에 주문했는데 오늘 13일에 도착했으니 7일만이다. 서점에서는 책이 빨리 구해져 일찍 보낼 수 있었다고 문자를 보내줬다. 주문한 책 중에 구입하기 좀 복잡한 게 섞여 있었나 보다. 백석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1995년 83세를 일기로 양강도 삼수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자.. 2020. 4. 13.
군산 해망동 새벽 풍경 실뱀장어 잡이 배들을 담으러 새벽길에 갔는데 안개가 끼어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비오리와 아침부터 한 성깔하는 재갈매기 괭이갈매기 등등과 동백대교 건너편 장항 풍경이 안개 위로 보인다. 겨울같은 봄이 쉽게 지나갈 것 같지 않다. 2020. 4.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