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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디언의 영혼 - 오히예사

by 여름B 2005. 7. 6.

                                               인디언의  영혼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착각하여

원주민의 이름을 인디오(Indio:스페인어로 인디언이란 뜻)라 부른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름은 뜻하지 않게 인디언이 되었고, 그들의 삶과 역사는 백인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기 시작했다.

 

문명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 속에 자연과 야생의 삶은 점점 벼랑 끝으로 몰렸다.

백인들이 만들어낸 오만과 편견의 현대사를 거치며 그들의 순수한 삶과 역사는 사라졌지만,

이제 인디언은 조화로운 인간의 전형으로, 자연의 사상가로,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고귀함을 간직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디언의 지혜와 사상을 배우고자 하고, 그들의 삶의 방식에 존경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단순한 삶, 드높은 기상과 용기,

올바른 정신을 보다 새롭게 해석하고 승화시켜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이제 인디언의 삶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만,

그 기억만이라도 공정하고 옳은 것이기를 소망하는 < 인디언 의 영혼  >저자 오히예사는 이 책에서 인디언의 자유로웠던 야생의 삶을 아름답게 그려내면서, 

수세기 동안 자연과의 영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정신세계를 정결하고도 절도 있는 문장으로 되새기고 있다.

 

                                                                                                                                     

                                                                                                                                 

 

▶ 인디언 문학의 거장 오히예사의 글 속에 살아 숨쉬는 인디언들의 영혼!


수많은 저서와 연설을 통해 현대 아메리카 대륙에 진정한 인디언의 정신을 전파한

작가 찰스 이스트먼. 수우 족 인디언으로 태어나 전통적인 인디언 방식으로 용감한 사냥꾼이자 전사로 성장했던 그는 아버지에 의해 백인사회에 편입했다.

 

보스턴 의대를 졸업하고 최초의 인디언 출신 의사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던 그가 인디언 문제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백인 기병대가 ‘운디드니’라 불리는 작은 골짜기에서 수많은 무고한 인디언들을 학살한 ‘운디드니 대학살 사건’을 경험하면서부터이다.

 

산골짜기로 달아나는 여자와 아이들까지 무참히 살해당하는 현장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면서 그는 아메리카 대륙에 수만 년 전부터 인디언이 지켜온 고귀한 정신과 사상을 보호하는 일에

자신의 길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이름을 어릴 적 인디언 이름인 오히예사(승리자)로 바꾼 그는 보호구역의 열악한 환경에 처한 인디언들을 진료하면서 그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과 영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아메리카 인디언의 고유한 사상을 알리고, 야생의 숲과 인디언의 정신세계를 담은 저서를 펴내면서 인디언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바로잡는 데 크게 공헌했다.

 

특히 인디언들의 정신과 숲 속의 생활방식을 바탕으로 출발하게 된 보이스카웃의 출범은 그의 노력에 힘입은 것이다.

순수한 인디언의 혈통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숭고한 문화가 후대에게 남겨진 것은 오히예사 같은 인디언 작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 문명인의 언어로 승화시킨 인디언의 실체적 삶과 사상


오히예사는 인디언 스토리 텔러와 구전 역사가들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16세가 될 때까지 할머니와 훌륭한 삼촌의 손에서 인디언 전통에 따라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디언의 삶의 방식과 언어, 문화, 구전된 역사 등을 직접 배우고 경험했다.

 

이 시기의 다른 인디언 작가들은 너무 일찍 기숙사 학교에 끌려가 백인 교육을 받은 나머지, 부족의 전통적인 생활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경험을 했다 해도 교육을 받지 못해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백인 작가들의 통역이나 해석을 거쳐야만 했다.


다트머스와 보스턴 의과 대학에서 공부한 오히예사는 뛰어난 학식을 갖고 있으면서

더불어 인디언의 삶의 방식와 역사적인 사건들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통역자나 백인 인류학자, 이야기 수집가들을 거칠 필요가 없었다.

 

11년 동안 삼촌과 할머니의 보호를 받으며

전통적인 인디언 방식에 따라 젊은 사냥꾼이자 전사로 성장했기 때문에, 이때 배운 기술과 영적인 가치관들은 훗날 그의 삶과 글 속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독특한 이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오히예사는

인디언 삶의 방식을 구체적이고도 논리적인 서술로 이끌어내면서

독자들에게 단단한 설득력을 제공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막연한 신비와 환상이 아닌 실체적 삶에의 의지와 영적인 교훈들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인디언 문화의 당위성을 증명해주는 것들이다. 아기를 가진 인디언 여성의 태교부터 아기의 탄생과 교육, 놀이, 그리고 인디언 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지위와 도덕관념, 종교, 전통을 아우르면서 작가는 인디언 사회가 얼마나 합리적이고, 민주적이었으며, 고결한 정신세계를 간직하고 있었는지 강조하고 있다.

 

“인디언들의 신비한 풍습과 영적 세계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지만 대부분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

 

단순한 구경꾼의 눈으로는 우리의 문화에 담긴 진정한 의미와 상징성을 이해하기 어렵다. 나의 이 보잘것없는 책은 학자의 논문이 아니다.

이 글은 진실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죽은 뼈를 짜맞추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그것들에 피와 살을 입혀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드는 일에 관심을 쏟을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가르침과 지혜에 대해 낯선 이방인들이 많은 글을 써왔다.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상업적이거나 호기심으로만 그 주제를 다루고 있다. 나는 인디언들의 지혜가 인간 모두의 삶에 어떤 가치를 지니고,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를 말하고 싶다.” 
 -오히예사


 

인디언 여성의 태교


인디언은 생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종교적이었다.

아이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잉태되는 첫날부터 젖을 떼는 두 살 무렵까지 아이에게는 어머니의 영적인 영향이 매우 중요하다고 우리는 믿었다.

인디언 어머니는 아이를 임신하는 그 순간부터 순결한 언행과 명상을 통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열려 있는 영혼에게 그가 ‘위대한 신비’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쳤다.

인디언의 아이 교육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장차 어머니가 될 여성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고요하고 한적한 곳에서,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눈동자에 새기며 홀로 생활하는 것을 첫번째 원칙으로 삼았다.

 

                                                                                                                                         


 

 

인디언의 교육


침묵과 과묵함은 인디언의 인격 형성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였다.

인디언들의 생활 원칙은 언제나 점잖고 예의 바른 것이었다.

인디언 아이라면 누구든 힘든 시간들을 불평 없이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격렬한 전투에서 용감한 전사가 되어야 함은 물론 어떤 부족함도 참아내야 한다.

그리고 2,3일 정도는 음식이나 물 없이도 거뜬히 지낼 수 있어야 하며,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또한 낮이든 밤이든 길 없는 야생 지대를 방향을 잃지 않고 꼬박 달릴 수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전사가 되기를 갈망한다면,

그 어느 것도 거부해서는 안 된다.


해가 뜨고 지는 장엄한 시간에 아이는 산꼭대기에 우뚝 서서 드넓은 대지를 내려다보며 ‘위대한 신비’와 마주했다.

그곳에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서서, 침묵 속에서 ‘위대한 신비’의 힘에 자신을 내맡겼다. 하루 낮과 하룻밤, 또는 이틀 낮과 이틀 밤 동안, 드물게는 며칠씩 그런 식으로 서 있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신에게 노래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

 

이 신성한 명상 상태, 환희의 체험을 통해 어린 인디언 신비가는 존재의 가장 큰 행복을 발견하고, 생명의 근원이 되는 힘에 다가갈 수 있었다.
인디언들에게 학교 건물과 책과 정기적인 수업 시간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디언 아이는 자연의 방식으로부터 배움을 얻었다. 숲이 곧 학교였다.

 

언제나 자연 세계와 가까이 접촉함으로써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주위 생명체들과 다정다감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인디언 아이에게는 영적인 세계가 더없이 현실적인 것이었으며,

생명의 빛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존재 안에 풀리지 않는, 풀릴 수도 없는 ‘위대한 신비’가 깃들어 있음을 알았다.

 

 

 

 

 

인디언 사회의 규율


인디언들의 자기 절제와 인내심은 모두 강한 훈련을 통해 얻어진 것이며, 뛰어난 조각예술도 홀로 끊임없이 연습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인디언들은 누구라도 신체 단련과 금식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고깃국은 주로 노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젊은 사람은 따뜻한 음식을 먹어서도, 물을 많이 마셔서도 안 되었다.
인디언들의 일반적인 생활 규칙은 진지함과 예의 바름이었다.

 

티피 안에서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인디언의 생활 방식에서는 그런 본능적인 배려와 세심함이 없다면 그 공동체 생활이 금방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디언들은 누구나 가족 구성원 각자의 소유물과 개인적인 공간을 존중하고, 습관적으로 조용하고 질서 있고 단정한 태도를 지켜나갔다.


인디언은 어려서부터 마음속에 남성다운 강인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을 키웠다.

그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음식과 성적인 관계를 엄격히 절제하는 한편,

꾸준하고 강도 높은 운동이 필요했다. 인디언 남자는 이따금 짧은 기간 동안 금식을 했으며,

달리기와 수영, 또는 땀천막 의식 등으로 념쳐 나는 기운을 발산했다.

 

특별한 금식 수행과 함께 육체를 지치게 함으로써

지나친 성적 욕망을 다스릴 수 있었다.

 

 

인디언 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치


여성의 위치가 문명의 척도라고 얼굴 흰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인디언 여성만큼 확실한 위치를 차지한 경우도 없을 것이다.

 

인디언 사회에서는 도덕성과 혈통의 기준이 여성에게 주어졌다.

아내는 남편의 이름이나 남편 부족을 따르지 않았으며, 아이들은 엄마 쪽 부족에 속했다.

가족의 모든 재산이 아내 소유이고, 모계를 따라 혈통이 이어졌다.

그리고 집안의 명예가 아내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인디언의 우정


인디언들에게 친구는 ‘나의 슬픔을 대신 지고 가는 사람’이란 뜻이다.

인디언들 사이에서 가장 고귀한 우정은 의형제를 맺은 관계, 또는 생과 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한 친구 관계였다.

 

이런 우정은 대개 어려서부터 맺었으며, 죽음에 의해서만 깨어질 수 있었다.

그것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도덕적으로 돕고 의지하기 위한 순수한 동료애였다. 인디언들은 필요하다면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기로 맹세하곤 했다.

 

어떤 것도 그 맹세를 깨뜨릴 수 없었으며,

또한 서로에게 인디언의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요구하는 일도

없었다.

 

 

 

 

 

인디언의 종교


인디언들이 행하는 종교 의식들은 저마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얼굴 흰 사람들이 십자가를 찬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디언들은 태양을 숭배했다.

인디언들의 눈에는 태양과 대지가 명백히 모든 생명의 원천이며, 그것은 과학적인 진리이면서 동시에 시적인 은유이기도 했다.

 

우주의 아버지인 태양은 자연의 원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우리의 어머니인 대지의 인내심 많고 비옥한 자궁 속에는 모든 동식물과 인간의

숨겨진 태아가 있다.

 

신은 다만 이 대지 위에서 올바르게 살고 겸허하게 행동하는 이들을 자신의 품 안에

받아들일 뿐이다.

그것이 인디언들의 변함없는 믿음이었다.


 

 

인디언 사회의 가치관


인디언에게 개인의 존재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씨족이든 부족이든 모든 조직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이루어졌다.

원치 않는 사람은 언제든 부족을 떠나 자기들만의 무리를 만들 수 있었다.

 

누구도 집단에 소속되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인디언 사회에서는 이름에 상품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고, 국가의 부를 축적하는 일도 없었다.

또한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걷지도 않았다.

추장들도 영향력은 크지만 권력은 거의 없는 자연스런 지도자일 뿐이었다.
인디언들이 지속적으로 도시를 발전시키거나 물질문명을 발달시키지 않는 것은 무지하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소박한 인디언 현자의 눈에는 수많은 인구가 한곳에 집중해서 모여 사는 것이야말로 타락의 근원이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도덕적으로도 그러했다.
인디언들에게 음식은 신성한 것이지만,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는 것은 죄악이었다.

사랑은 좋은 것이지만, 탐욕은 사람을 망가뜨린다.

 

사람들이 밀집해 살아가는 불결한 환경에서 생겨나는

온갖 전염병보다 더 무섭게 여긴 것은 다른 사람들과 너무 자주 접촉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영적인 힘을 잃게 되는 일이었다.


문명이 이룩한 눈부신 성과물에 비교할 때 어쩌면 인디언들의 기여는 보잘것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디언들이 갖고 있던 민주주의 정신,

인간의 평등과 정의의 실천은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한 것이며,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하는 것들이다.

더 많은 부를 쌓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가면서 현대인은

너무도 오랫동안 대지로부터,

자연의 정직한 삶으로부터 멀어졌으며인간다움이 무엇인가를 잊었다.


인디언은 과거의 영광과 자신들의 시적인 전설, 예술품 속에서만 살아 있지 않다.

대지가 더 이상 파괴되지 않고, 공기가 다시 순수해지고,

누구나  ‘위대한 신비’ 앞에서 경이로운 눈길을 간직하기를 바라는 모든 이들의 정신 속에서 인디언은 언제까지나 살아 있을 것이다.

 

 

 




Daybreak Vision



Oneida Iroquois


 


 
가져온 곳: [현아사랑]  글쓴이: 배창재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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