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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없이

치약을 짜면서

by 여름B 2008. 9. 15.

     

     

     

      

     

     

    나는 어렸을 때, 치약을 쓸 때에는 아래서부터 짜서 쓰도록 어른들로부터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성인 되고 결혼해서 아이들을 나을 때까지 아주

    단정하게 아래로부터 꾹꾹 눌러 짜서 쓰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조금 자라

    치약을 스스로 사용할 때가 되었을 때, 나도 내가 배운 것처럼 그들에게 반드시 아래서부터

    차곡차곡 짜서 쓰도록 그렇게 가르쳤다. 그런데 몇 번을 가르쳐도 아이들은 그냥 중간부터 

    눌러 쓰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듣기 싫게 잔소리를 했는데도 아이들과 같이 사용하는 

    아내의 훼방에 힘입어 아이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당연히 그냥 중간부터 눌러 

    쓰는 것을 고치지도 않았으며 나도 더 이상 말하기 싫어서 끝부터 짜쓰기는 그만 두고

    말았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중간부터 치약을

    짜 쓰기 시작하게 되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거실 화장실을 쓰고 나 혼자만 안방 화장실을

    사용하기에 아이들이나 아내가 와서 치약 중간을 눌러 놓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고 내가

    그렇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소수의 안방 화장실이 다수의 거실 화장실에

    동화되고 만 것이다.

     

     

      

     

     

    나는 잠깐의 고민에 빠졌다. 이 버릇을 다시 예전으로 돌려 바닥부터 짜 쓸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이대로 신경쓰지 말고 손에 잡히는 대로 중간부터 짜 쓸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치약은 중간부터 짜 쓰나 끝부터 짜 쓰나 결국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사용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굳이 중간이나 끝부터를 구분하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사용하면

    되지 않겠는가. 뒤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나는 요즘 교과서대로만 하기보다 가끔 인생의 작은 부분들은 한번쯤 빙 돌아가고 싶다.

    술 마시고 집에 오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바지를 내리고 싶고, 자동차 통행이

    거의 없는 곳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치고 싶고, 아내 몰래 통장을 거덜내고 싶다. 

    생활 전반을 깨뜨리는 일만이 아니라면......

     

    젊은 날 가 보지 못했던 무지개 너머에 대한 막연한 꿈의 늦은 발로일까?

      

     

     

                           음악          이은미의 Over The Rainb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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